솔직히 말하면, 나도 몰랐다.
AI기반 공급망 관리니 수요-생산기반 자동 주문 예측 플랜이니 떠들면서, 정작 내 집 근처 편의점 쓰레기봉투가 어디서 오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봄마다 밭을 덮는 멀칭 비닐이 호르무즈 해협과 연결돼 있다는 것도.
중동 전쟁이 터진 지 한 달. 그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두 가지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마트 매대에서 사라진 쓰레기봉투. 또 하나는 봄 파종을 앞두고 비닐을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는 농민들이다. 같은 원인, 다른 위치의 위기였다.

사례 1. 종량제 봉투 — 공포가 만든 가짜 품귀
서울에서 하루 270만 장이 팔렸다. 평소 55만 장의 다섯 배다. GS25는 판매량이 325% 뛰었고, 이마트는 287% 폭증했다. 편의점 진열대가 비었고, “1인 1장” 제한이 붙었다.
왜 그랬을까. 종량제 봉투 원료가 폴리에틸렌(PE)이고, 그게 나프타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호르무즈가 막히면 나프타가 안 들어오고, 그러면 봉투도 없어진다는 논리가 SNS를 탔다. 논리 자체는 맞다. 문제는 속도였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전국 228개 기초지자체를 긴급 점검했더니 54%가 6개월치 이상 재고를 갖고 있었다. 전국 평균 3개월치, 서울 4개월치, 서귀포시는 9개월치였다. 재활용 업체들이 보유한 재생 PE만으로도 봉투 18억 3000만 매를 더 만들 수 있었다. 정부는 품질 검수 기간을 10일에서 하루로 줄이고 제조단가도 높여줬다. 봉투 가격은 지자체 조례로 고정돼 있어서 공장이 마음대로 올릴 수도 없는 구조다.
결론은 간단했다. 재고는 있었다. 부족한 건 봉투가 아니라 신뢰였다.
한 사람이 100장씩 쌓아두는 동안, 당장 한 장이 필요한 이웃이 빈 매대 앞에 섰다. 사재기가 품귀를 만들고, 품귀가 다시 사재기를 불렀다. 전형적인 공포 수요 사이클이다. 실물 공급망 문제가 아니라 정보와 심리의 문제였다.
사례 2. 농업용 비닐 — 이건 진짜였다
광주원예농협 농업용 필름공장.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러워야 할 시간에 공장이 조용했다. 원료 창고는 절반 이상 비어 있었다. 32년간 적자를 감수하며 농민에게 저가로 비닐을 공급해온 이 공장이, 남은 원료 500여 t으로 4월 중순까지밖에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프타를 공급하던 LG화학 여수공장 NCC 2공장이 멈췄다. 한화솔루션도 일부 라인을 중단했다. 주요 NCC 가동률이 전쟁 전 80%에서 50~60%로 뚝 떨어졌다.
| 항목 | 수치 |
|---|---|
| 나프타 가격 상승폭 | t당 140~150만원 → 45% 이상 급등 |
| 비닐하우스용 비닐 | kg당 5000~6000원 → 7000원 인상 검토 |
| 멀칭 필름 | 3월 30% 인상, 4월 최대 50% 추가 전망 |
| 담양 A업체 잔여 원료 | 월 필요량 100t 중 10t만 남아 |
| 수급 정상화 후 재가동 | 최소 2~3개월, 최대 반년 소요 전망 |
이주연 광주원예농협 필름공장장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농업용 필름은 주문 생산이라 미리 쌓아둘 수 없는 구조예요. 원료 수입이 막히면 공장이 멈추고, 공장이 멈추면 농민들한테 못 주는 거예요. 수급이 정상화돼도 최소 2~3개월은 걸려요.”

봄 파종기를 앞두고 비닐을 구하러 동분서주하는 농민들. 멀칭 비닐 값이 올랐고, 비료용 요소 가격도 전쟁 이전보다 1.5배 올랐다. 비용은 오르고, 수확은 불확실해지는 구조다. 농림축산식품부는 6월까지 비료·사료 재고는 버틴다고 했지만, 현장 분위기는 달랐다.
종량제 봉투는 심리가 만든 위기였다. 농업용 비닐은 실물이 없는 위기였다. 겉으로 보면 비슷한 ‘비닐 대란’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문제였다.
— 솔직하게 —
두 사례를 보면서 다시 한번 실감했다. 공급망은 잘 돌아갈 때 보이지 않는다.
종량제 봉투가 어디서 오는지, 봄 비닐이 무슨 원료로 만들어지는지, 그 원료가 어느 나라 어느 해협을 통해 들어오는지. 평소엔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냥 돌아가니까.
그런데 딱 한 가지가 막혔다. 호르무즈. 그게 전부였다. 그 하나가 막히면서 마트 계산대의 봉투가 사라지고, 봄 밭을 덮어야 할 비닐이 귀해졌다. 연결고리를 알고 있는 사람도 실제로 끊어지기 전까지는 체감하지 못한다.
공급망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말은 이거다.
공급망은 교과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예상 밖의 곳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터진다. 그래서 계속 공부해야 한다.
이번 위기가 끝나도, 다음엔 또 다른 봉투가, 또 다른 비닐이 어딘가에서 사라질 것이다. 어디서 터질지는 모른다. 다만 그때 조금 더 빨리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면, 이 공부가 헛되지 않은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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